Passage

- 2020. 5. 24. 온누리교회 SNS청년부 예배

 

늑대의 자살이라고도 불리는 에스키모인의 늑대 사냥법은 사단이 우리의 영혼을 빼앗는 방법과 흡사하다.

영혼 속 무감각해진 부분이 있으면 사단은 영혼에 올무를 놓음. 무뎌진 감각으로 같은 일을 반복할 때 영혼의 심각한 훼손을 주는 지도 모르고 그 일을 계속함. 

 

 

나는 영혼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온라인 예배의 편리함에 익숙해 지면서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고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구별하면서 드리는 태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임재를 바라는 마음은? 침노하는 정신은?

그것들을 잃어버린 가운데서 예배라는 행위만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습관적인 예배는 영혼에 치명적인 손상이 옵니다. 

 

본문은 부르심의 사명을 위해 달려갔던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선 일상의 매너리즘의 빠져 인생의 길을 이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일이 없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살아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

 

 

본문은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사람이자 자신을 다 버린 사람 바울을 보여줍니다. 

세번의 전도여행에서 억울함과 방해 공격이 일상이었다. 목숨의 위협도 많았습니다.

극심한 외로움과 외면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인생의 어떤 시련과 어려움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사람.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그의 고백속 이 비밀이 드러납니다.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을 연약한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질그릇은 없어져도 별 아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인거죠.

자신이 이렇게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질그릇이라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질그릇에 보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바울이 기도한 육체의 가시는 무엇일까요?

육신의 정욕의 가시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깊은 어려움 (탐욕, 음란, 교만, 분노, 미움 등) 이 아닐까요?

 

내가 사도임에도 아직도 이런 죄에 묶여있습니다. 제발 이것을 거둬가 주십시오 하는 바울의 기도에

주님께선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십니다.

 

그 가시 때문에 기도의 자리와 십자가 앞으로 돌아올 수 있고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이 충분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고통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요?

 

신앙은 철저한 관계성입니다.

비참한 죄인 - 십자가 라는 관계입니다.

예수와 예수의 능력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약함과 부족을 그분의 강함이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2: 1~2

(렘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2: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우리는 약한 존재로 하나님 밖에 없는 때를 살아가길 소망합니다.